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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털루 학살 : 영국 민주주의의 비극적 전환점

투더리짱 2025. 2. 10.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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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8월 16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수만 명의 시민이 모여 보다 공정한 정치 체제와 투표권 확대를 요구하는 평화로운 시위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이날 시위는 참극으로 끝났고, 역사에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로 기록되었습니다.

 

피털루 학살의 배경

19세기 영국은 극심한 빈부 격차로 인해 사회적 불만이 높았습니다.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맨체스터는 면직물 산업으로 번영했지만,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최저 수준의 임금을 받았습니다.

 

  • 공장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혹독한 조건 속에서 일했습니다.

  • 노동자들이 사는 지역은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질병이 쉽게 퍼졌고, 많은 이들이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전쟁(나폴레옹 전쟁, 1815년 종결)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일자리 부족으로 고통받았습니다.

  • 당시 영국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일부 남성만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노동자와 여성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맨체스터 시민들은 변화를 요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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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털루 학살의 전개

1819년 8월 16일, 약 60,000명의 시민이 맨체스터 세인트 피터스 필드(St Peter's Field)에 모였습니다. 이들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정치 개혁과 보통선거권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대가 시위대를 향해 돌격하며 폭력을 행사했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고 약 18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피털루(Peterloo)’라는 명칭은 시위가 벌어진 세인트 피터스 필드와 1815년의 워털루 전투를 합쳐 만들어졌습니다.

 

피털루 학살 이후의 변화

 

피털루 학살 이후 영국 정부는 오히려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강경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결국 13년 후인 1832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 맨체스터는 처음으로 의회를 대표하는 의원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성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역사가 남긴 의미

 

피털루 학살은 영국 민주주의 발전의 비극적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매년 8월 16일이 되면, 영국에서는 이 사건을 기리며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가치를 되새기는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억압받는 시민들이 끝까지 변화를 위해 싸웠던 역사적 순간으로 기억되며,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